Saladin’s Blog

하이퍼텍스트의 빛과 그늘

Posted on: 9월 10, 2008

대략 10여년 전에 컴퓨터가 우리의 일상과 완전히 밀접할 수는 없었다. 지금까지 컴퓨터에 관한 문제는 말그대로 기술적인 문제로 치부되어 왔고 특히 우리나라는 소위 ‘정보화’라는 표제아래, 인문학의 기반성장이 부족한 상태에서 인터넷과 하이퍼 텍스트, 그리고 월드 와이드 웹이라는 기술만을 진보시켜 그에 따르는 꽤 새로운 패러다임에 대한 사전고찰이 없이 그것을 진행해 왔다고 보인다. 그런면에서 한가지 예를 들어보면, 유비쿼터스는 원래 포스트모더니즘의 사조와 맞물려 온라인 패러다임이 내내 추구했던 본질이었으며 작금의 사회학자들이 웹의 발전을 지켜보면서 이미 오래전 제시했던 개념이었다. 

새로나온 혁신적인 개념인 것처럼 보여 대중은 최신 휴대폰의 기능을 보고 마냥 신기하고 재미있어 할 뿐, 따라서 그것이 미치는 순기능과 역기능중 역기능에 대한 통제가 국가차원에서 관리되더라도 이용의 주체인 대중들이 따라가주지 못해 어려움을 겪는 현실이다.

 

*출처: 인터넷 하이퍼텍스트 그리고 책의종말/배식한/책세상문고/
선택적 부분발췌

하이퍼텍스트는 우리의 일상생활과 매우 닮았다. 나는 매순간의 선택을 통해 어떤 경로를 만들어간다. 이것이 나의 하루 생활이다. 이는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이다. 예를 들어 쇼핑센터를 상상해보라. 거기에는 정말 많은 종류의 제품들이 진열되어 있다. 그중에서 당신은 어느회의 어떤 재품을 살것인지 결정해야한다. 하이퍼텍스트의 독자들도 이와 비슷하다. 텍스트의 어떤 지점에 가면 독자에게 선택지가 주어진다. ‘다음에는 무엇을 읽으시겠습니까?’라고 하이퍼텍스트는 반복해서 묻는다.

독자들은 이 반복되는 질문에 다른 방식으로 대답을 할 것이고, 각기 나름의 경로를 선택하게 될 것이다. 이것이 바로 비선형성[순서없이 많은 방향에서 접근가능함]이 가리키는 것이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처음부터 끝까지’식으로 텍스트를 읽는 하나의 정해진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그 대신 ‘다음에는 무엇을 읽으시겠습니까?’란 질문을 받은 독자가 그 대답으로 내리는 결정에 따라 자료들을 관통하면서 짜이는 ‘거미줄들’이 있을 뿐이다.

하지만 하이퍼텍스트와 일상생활의 이러한 일치는 밝은 면 뿐만아니라 어두운 면도 함께 지니고 있다. 언어의 중요한 목적 중 하나는 무질서하게 흩어져 있는 주면 상황을 정리하는 것이다. 그곳에 어떤 선을 주고, 질서를 주기 위해서 언어의 개념이 만들어진다. 이점에서 보자면 언어자체가 하나의 디지털 장치이다. 아날로그 적이고 연속적인 세계와 자연을 디지털화하는 장치. 물론 언어라는 디지털 장치는 컴퓨터처럼 2진법을 쓰지 않는다. 한글만 보더라도 자음 14개, 모음10개로 총 24개의 기회가 있고, 영어는 a에서 z까지 26개의 알파벳이 있다. 그렇다면 한글은 24개, 영어는 26개의 기호를 가진 디지털 기호체계이다. 이 언어를 다시 1과 0으로 디지털화하는 컴퓨터는 언어라는 디지털 기회체계를 한번 더 디지털화하는 것이다.
디지털화는 연속적인 것을 인위적으로 끊어서 불연속적인 것으로 만드는 것인 만큼 세계의 모습을 완벽하게 옮길 수는 없다. 오르막길이 좋은 예이다. 우리는 쉽게 오르기 위해 오르막길에 계단을 만들 수 있다. 하지만 계단으로 만들면 걸어다니는 사람들이야 좋을 지 모르지만 자동차나 장애인의 휠체어는 오를 수 없다. 계단에서 보는 것 처럼 디지털화된 것에는 항상 특정 목적이 개입한다. 영화도 마찬가지이다. 영화는 우리의 움직임을 1/24초에 한번씩만 찍어 저장한다. 하지만 우리가 실제로 그렇게 움직이는가? 로보캅처럼? 그렇지 않을 것이다. 1/24초와 2/24초 사이에도 우리는 끊임없이 움직이고 있다. 하지만 영화는 그 사이의 움직임까지 찍을 필요가 없다. 왜? 1/24초에 한번씩만 찍어도 우리 눈은 그 사이가 비었다는 것을 전혀 알지 못하기 때문에. 음악도 그렇다. 우리가 듣기에 전혀 거슬리는 것이 없을 정도로만 음의 연속적인 파장을 세밀히 계단식으로 디지털화하면 된다. 언어도 마찬가지 이다. 언어를 통한 자연의 디지털화도 우리 인간의 생존에 필요한 만큼만 이뤄지면 된다. 하지만 인간의 생존환경이 변화함에따라 언어가 세계를 디지털화하는 방식도 달라질 수 밖에 없다. 인간의 삶이 문화적인 것이 되고 또 미묘한 것에 더 민감하게 반응한다는 것은 어쩌면 그 만큼 계단의 턱과 폭이 더 낮고 좁은 디지털화가 필요하다는 뜻이 아닐까?
어쨌든 언어는 이처럼 자연에 대한 공평무사한 기술이 아닌 특정부분을 두드러지게 하는 기술을 통해 인간의 목적에 기여한다. 기본적으로 정리한다는 것은 취사 선택을 의미한다. 버릴 것은 버리고 택할 것은 택해야 한다. 언어는 그러한 선택을 위한 가장 기본적인 도구이다. 그리고 언어로 이뤄지는 각종 학문적 작업의 결과물인 선형적인 질서와 책은 그러한 선택의 폭을 최대한 좁히려는 노력의 산물이다. 이러한 선형적인 질서를 통해 우리는 많은 부분에서 어떤 선택이 효율적인지를 미리 배운다. 선택을 위한 우리의 고민은 이제까지의 성과를 기반으로 한 발 더 나아간 것에 할애 되어야 한다.
그런데 하이퍼텍스트는 무작정 우리를 처음의 선택의 상황으로 다시 내몬다. 우리는 어느회사의 어떤 제품이 좋은지를 이미 책이나 신문, 소문등 다른 경로를 통해서 알고 있고, 그래서 그것을 선택한다. 그렇다면 하이퍼텍스트적 상황에서는 나는 무엇을 지침으로 삼아 여러갈래의 경로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가? 이를 위해 메타-하이퍼텍스트적 지침이 다시 필요해지는가? 버블즈Bubules와 칼리스터Callister. Jr.는 이러한 상황에서 다음과 같은 역설로 표현하고 있다.


이제 우리는 …. 하나의 역설을 보기 시작한다. 만약 하이퍼텍스트가 연상의 다른 대목들로 마디들의 다양한 이음을 가능하게 한다면 그것은 또한 각각의 마디들을 단편화하고, 맥락에서 벗어나게 하고, 본래의 이야기나 일련의 논증에서 차지하고 있던 자신의 위치를 벗어나게 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측면으로’ 연상하기가 어떤 맥락에서는 본래의 ‘선형적인’ 것보다 더 유용한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어느 하나에 ‘특권’을 부여함이 없이 연상되는 모든 것을 평준화하는 것은 그 모든 것을 임의적인 것으로 만들 수도 있다. …. 비록 잠정적이라 하더라도 그런 어떤 출발점이 없다면, 리좀체계를 탐색하는 것을 단지 무정부적인 어떤 것에 그쳐버릴 수도 있다. – 최첨단 문학해석을 위한 멋있는 그림일 수는 있겠지만 초보 학습자에거는 꼭 그런 것만도 아니다. 기존의 이야기들에 문제를 제시하는 것과 그를 대신할 읽기를 제안하는 것은 별개의 것이다. …….. 중심없는 읽기는 읽기가 아니다.

하이퍼텍스트를 장려하는 이들은 자기에게 지침을 주는 어떤 음성을 기대하고 그러한 음성에 자기 자신을 의탁하고자 하는 태도 자체가 바로 문제라고 지적할 것이다. 생각을 바꾸면 똑같은 사태도 전혀다르게 보인다. 생각을 바꾸면 슬품과 부정과 향수와 죄의식이 유쾌함과 긍정과 기대와 천진난만으로 바뀐다.


있지도 않는 근원을 끝까지 있다고 우겨 만사 제쳐두고 헛되이 찾아 헤매다 결국 깨어져버린 구조주의자의 가슴 한가운데는 따라서 놀이를 서글프게, 부정적으로, 향수에 젖어, 죄진 것 처럼 바라보는 루소적 사고방식이 똬리를 틀고 있다. 하지만 이 반대쪽에는 니체적인 긍정, 즉 세계의 놀이, 됨의 천진난만에 대한 유쾌한 긍정, 다시 말해 흠도 진리도 적극적으로 해석될 기원도 없는 기호들의 세계에 대한 긍정이 있다. 이 긍저잉 바로 중심없음을 중심의 상실이 아닌 다른 어떤 것으로 만들어 준다.

결국 책이 세상의 지침이 되었던 것처럼 하이퍼텍스트도 실세계의 지침이 될 거이라는 수직적 사고 자체를 뒤집어야 한다. 이러한 사고는 결국 좌절과 부정적 사고와 과거에 대한 헛된 향수만을 낳을 뿐이다. 책이 세상의 이미지로서 세상과 수직의 다른 차원에 존재하는 것이아닌 것처럼 하이퍼텍스트 역시 실세계와 수직의 다른 차원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수평의 차원에 인접해 있는 다른 공간이다. ‘메타meta’란 존재하지 않는다. 책, 신문, 방송, 학교, 하이퍼텍스트 어느것도 중심에 또는 다른 것보다 더 높은 곳에 있지 않다. 이들은 모두 수평의 판 위에서 자기의 일부를 떼어주고 다른 것의 일부를 이양받는 공유 결합방식으로 다양하게 맞닿아 있다.
그렇다면 하이퍼텍스트에 대한 이러한 수평적 이해는 우리에게 어떤 쓸모가 있는가? 하이퍼텍스트는 새로운 글쓰기, 세계를 바라보는 새로운 관점을 제시해줄 뿐 효용이라는 것은 기대할 수 없는 것인가? 효용이라는 개념 자체가 모더니즘적 사고의 결과물인가? 효용의 척도가 하나로 고정되어 있다면 그것은 정말 포스트 모더니즘이 비판하는 효용이 될 것이다.
지금 제시하고자 하는 사례가 모더니즘 또는 획일적 효용 개념의 틀을 벗어나지 못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런 문제는 일단 접어두고 한 분야의 조그한 성공 사례로서 이를 살펴보기로 하자. 우리는 컴퓨터 프로그래밍에서 포스트 모더니즘적 하이퍼텍스트 이해 및 그 활용이 가져온 흥미로운 성공의 사계를 찾을 수 있다. 제럴드 와인버그의 “자아를 내세우지 않는 프로그래밍”이 그 예이다.
야구를 해봤거나 도끼로 장작을 패본 사람은 알겠지만 야구공을 방망이로 치거나 장작의 중간을 쪼개려면 팔에서 힘을 빼야 한다. 팔에 어떤 의지가 개입하게 되면 십중팔구 헛치거나 빗맞추기 마련이다. 여기서 필요한 것은 자아를 소멸시키는 것이다. 자아를 전면에 내세우면 오히려 일이 어긋난다. 자아를 없애려면 그럼 그 다음은 무엇인가? 우선 가능한 것은 합리성을 한 개인의 차원에서 확보하려는 시도를 버리고 인간 전체 또는 인간을 포함한 세계 전체 차원으로 확장해서 확보하는 방법이다. 헤겔의 ‘이성의 간계’가 바로 이 방법이다. 합리성의 화신인 이성이란 헤겔이 보기에는 한 개인의 사유능력을 초월 한 것이다. 개개인의 행동은 불합리하고 이해할 수 없는 이기적인 방향으로 일어나고 또 그렇게 전개된다. 이들의 행동을 보고 있노라면 도대체 신이 있기나 한 것인지 의심스러울 정도다. 그러나 이러한 행동들이 총체적으로 모여 나아가는 방향에는 어떤 목표가 있다는 것이 헤겔의 생각이다. 물론 이 방향은 아무에게나 보이지 않는다. 이것이 헤겔이 말하는 이성의 간사한 계책이다. 이성은 개개인의 불합리를 통해서 자신의 합리성을 실현한다는 것이다.
헤겔의 ‘이성의 간계’는 불합리와 부조리로 넘쳐나는 이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는 훌륭한 ‘위안’이다. 이 불합리와 부조리 저변에 도도히 흐르는 합리적 역사의 법칙이 있다는 사실 만큼 위안이 되는 것도 없을 것이다. 그것은 세계를 긍정적으로 포용하는 시선으로 바라보게 한다. 하지만 이 위안은 다른 위험을 안고 있다. 이러한 위안은 너무 쉽게 광신, 간섭, 폭력으로 발전한다. 위안이 확신이 되어 ‘역사의 발전 법칙’ ‘진리를 맹신하게 되면 사람들은 다른 사람의 무지를 안타까워 하고 그들에게 간섭하고 심하면 각종 언어적, 물리적 폭력까지도 휘두른다. 개인을 초월한 합리성이 다시 개인이나 특정 집단의 합리성으로 전락하는 것이다. 이 ‘타락한 합리성’의 폐해를 막는 방법은 차라리 합리성 자체를 폐기 처분하는 것이다. 누구도 합리성을 거론 할 수 없게 만드는 것. 그리하여 명령과 순종이 아니라 이해와 공동 협력이 중심가치로 자리 잡도로 하는 것이다.
하이퍼 텍스트는 다수의 힘을 극적으로 발현시킬 수 있는 구조를 지녔다는 점에서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어왔다. 교육 현장에서, 사업장에서 공동 작업을 실현하기 위한 시도가 다 방면에서 행해지고 있다. 현재 서버 컴퓨터의 운영체제 프로그램으로 주목 받고 있는 리눅스 개발은 그러한 시도가 성공을 거둔 대표적인 사례라 할 수 있다.


리눅수는 전세계의 모든 재능 있는 이들을 의도적으로 끌어들여 성공을 거둔 최초의 프로젝트 였다. 나는 리눅스의 태동기가 월드와이드 웹의 탄생과 일치하는 것을 그리고 ISP(Internet Service Provider) 산업과 인터넷에 대한 주류의 관심이 폭발하기 시작했던 1993~94년 경에 리눅스가 유아기를 벗어난 것을 우연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리누즈 토발즈Linus Torvalds는 인터넷의 급속한 보급을 가능하게 했던 그 법칙에 따라 일을 진행화는 방법을 알았던 최초의 사람이다.
– Eric S. Raymond/”The Cathedral and the Bazaar”

‘패치메일Fetchmail’이라는 전자우편 프로그램의 주 프로그래머이며, 근래에는 소스코드 공개운동 open source code movement 의 핵심적인 역할을 하고 잇는 인물로도 이름이 높은 에릭레이먼드는 ‘성당과 시장’또는 ‘성당과 아고라’의 비유를 통해 프로그래밍의 두가지 대조적인 방법을 소개하면서 어느 쪽이 더 효율적인지에 대한 실험이 현재 진행중이라고 말하고 있다. 먼저 나오는 성당 모델은 회사에서 상업용 소프트웨어가 개발되는 과정을 보여주는 것이고, 시장 모델은 앞에서 말한 리눅스 프로그램이 개발되는 과정을 나타낸다. 그는 이 두가지를 다음과 같이 기술한다.


리눅스는 내가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많은 것들을 뒤엎어 버렸다. 나는 유직스 시스템을 본받아 도구는 작게, 초벌 만들기는 재빨리, 프로그램 짜기는 천천히란 말을 몇 년 동안 설교 처럼 하고 다녔다. 또한 나는 어떤 중대한 복잡한 문제에 대해서는 좀더 집중적인 그리고 체계화된 접근이 필요하다고 믿었다. 가장 중요한 소프트웨어는 성당을 건축하듯이, 즉 찬란한 고독 속에 일하는 몇 명의 도사 프로그래머 또는 뛰어난 프로그래머들의 작은 모임에 의해 조심스럽게 만들어지고 배타 버전도 없이 발표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리누즈 토발즈의 개발 스타일, 즉 일찍 으리고 자주 발표하여 다른 사람들에게는 위임할 수 있는 것은 모두 위임하고, 뒤범벅이 된 부분까지 공개하는 그런 스타일은 나에게 놀라움으로 다가왔다. 고요하고 신성한 성당의 건축방식을 여기에서는 찾아볼 수 없었다. 대신 리눅스 공동체는 서로 다른 의견과 접근 방법이 난무하는 매우 소란스러운 시장 같았다. (리눅스 아카이브 사이트가 이것을 적절히 보여주고 있다. 이곳에는 누구나 파일을 올릴 수 있다) . 이런 시장 바닥에서 조리 있고 안정적인 시스템이 나온다는 것은 기적의 연속이 아니면 불가능 할 것 처럼 보였다.

이처럼 성당 모델은 몇 사람의 탁월한 프로그래머들이 다른 외부적 요소들에 방해 받지 않고 정해진 일정에 따라 일사분란하게 오직 자신들의 명석한 두뇌에 의존해 프로그램을 개발해내는 방식이다. 이에 반해 시장 모델은 가능한 한 빨리 각 개인이 이룬 조그만 성과들을 다른 사람들과 공유함으로써 어느 누구에 의해서든 기대하지 않는 곳에서 더 새롭고 훌륭한 결과가 나오기를 기다리는 방식이다. 여기서는 어떤 정해진 일정도, 통제도 없이 연구가 진행된다. 레이먼드는 공개 소스 프로그램인 리눅스가 이런 방식으로 성공적으로 개발되었음을 알고는, 자신도 페치메일을 개발하는 데 이 방식을 적용함으로써 또한 성공을 거둔다. 닫힌 소스코드와 열린 소스코드 중 어느 시스템이 더 효율적인가를 보여주는 이 실험은 아직끝나지 않았다. 어쨌든 최근 리눅스가 급속히 성장하면서 시장 모델의 약진이 두드러지고 있다. 이들의 성공과 실패는 위계 구조와 네트워크 구조중 어느 것이 바람직한지, 더 나아가 포스트모더니즘의 주장이 과연 현실적으로 어떤 긍정적인 의미를 지닐 수 있는 것인지를 판단하는 지핌이 될 수 있다.
우리는 그 결과를 주의 깊게 지켜보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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